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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erical Analysis/회사 이야기

기계공학부 대학원생이 개발자가 된 과정 - 커리어패스 공유

 안녕하세요 이노도리입니다 ㅎㅎ

 

 오늘은 저의 커리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하는데요, 제가 생각해도 우연의 우연이 겹쳐지면서 정말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먼저 저는 한양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공돌이입니다. 저는 04학번인데요, 당시 입학할 때 제가 기계공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그냥 취업이 잘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04년 당시만 해도 한양대 기계공학과 졸업생들의 취업률은 100%에 가까웠는데요, 이력서만 뿌리고 발품 좀 팔면 대기업 취업이 가능한 그런 시대였습니다. 저는 단순히 빨리 졸업해서 취업이나 하자라며 별다른 꿈도 없이 단순히 대학 졸업해서 취업하자가 목표인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1학년이 끝나고 군대를 다녀오고 또 복학을 하고 3학년 수업을 들을 때였습니다. 3학년 2학기 과목 중에 컴퓨터지원설계라는 과목이 있었는데요, 이 과목은 Computer Aided Design(CAD)과 관련된 과목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직접 코드를 짜서 실습을 해보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요, 이 프로젝트가 제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저는 빨리 졸업해서 취직 하는게 가장 큰 목표였는데 정말 재미있게도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겨 버렸습니다. 컴퓨터지원설계 과목에서 내준 프로젝트는 C언어와 OpenGL 라이브러리를 사용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물리 지식을 활용해 실시간 물리 시뮬레이션을 구현해 보는 과제였습니다. 단순히 중력 시뮬레이션을 해볼 수도 있고 유체역학의 단순한 정수압 방정식 등을 이용해 간단한 정수압 시뮬레이션을 구현할 수도, 동역학을 응용하여 강체 시뮬레이션을 구현해 볼 수도 있었습니다. 이 과제가 저에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저는 이 과제를 하면서 3~4일간 잠을 거의 자지 않았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에 가서 이 시뮬레이션 코딩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시뮬레이션 관련 기본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학교 도서관에서 책도 빌리고 이전까지 손도 대지 않았던 영어 논문도 찾아서 읽어보곤 했습니다. 정말 저에게 신기한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인데요, 지금 와서 보면 정말 천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히 충격적이었던 2009년 아바타의 등장

 

 

 그리고 당시 2009년에 사회에는 정말 대단한 사건이 있었는데요, 바로 영화 아바타의 등장입니다.(신기하게도 지금 다니고 있는 웨타디지털에서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저도 정말 감명 깊게 봤는데, 그 당시 영화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면서 이 영화 제작에 GPU(Graphics Processing Unit)가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Nvidia의 CUDA라고 하는 기술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아바타 제작에 이 GPU기술이 정말 큰 역할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관심이 생겨 세부 기술에 대해 더 찾아보니 General Purpose GPU(GPGPU)라고 하는 기술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기존 방법들을 획기적으로 가속시킬 수 있게 됐다는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시뮬레이션과 GPU를 응용하면 정말 대단한 일들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관련 연구들을 찾아보니 이미 관련된 연구들이 매우 많이 이루어진 상태였고 획기적인 속도 향상을 이룬 연구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더욱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엔비디아에서 CUDA를 내놨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저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에도 GPU 관련 연구를 하는 곳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 했는데요. (저는 이 일만 생각하면 정말 저에게 뭔가 천운이 있었던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CUDA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이것저것 정보도 찾아보고 하다가 CUDA 포럼에 한양대학교를 검색해 봤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연하게도 한양대학교의 한 연구실의 박사과정 선배님이 CUDA 포럼에 쓴 글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GPU 연구를 하고 있는 연구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연구실 홈페이지를 찾아가 보니 기계공학부 연구실이었고 전산유체역학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연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GPU관련 연구에 대한 내용은 게시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연구실 게시판에는 인턴 학생을 구한다는 공지가 떠 있었는데 저는 크게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연구실에 메일을 보내 연락을 했습니다. GPU에 관심이 있다는 내용을 메일에 적어서 넣었고 인턴을 하고 싶다는 그런 내용의 메일이었습니다. 

 

 연구실 선배님으로부터 연구실로 한 번 찾아오라는 답장이 왔습니다. 연구실로 찾아가자 선배님들은 저를 정말 신기하게 바라봤는데요, 연구실에서 GPU 관련 연구를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홈페이지에 올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저는 별다른 고민을 할 것도 없이 연구실의 인턴이 되기로 하였습니다. 처음 연구실 인턴이 되면서 지도교수님과 면담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지도교수님과의 면담도 참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많았습니다.

 

 처음 교수님과 면담을 시작하면서 교수님께서는 연구실 자랑을 하기 시작하셨는데요, 연구실 대학원생들 성적이 정말 좋다는 그런 내용과 최근 연구 성과가 뛰어나 좋은 과제도 따내고 연구실이 아주 잘나가고 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연구실 선배분들께서는 다들 학점 4.0이 넘는 수재들이라면서 자랑을 엄청나게 하셨는데요, 그러면서 제게 학점을 물어보셨습니다. 

 

 "그래 자네는 학점이 몇 점이나 되는가?"

 

 사실 저는 학점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딱히 목적도 없었고 단순히 취업만이 목표였으니까요.

 

 "2.9입니다."

 

 저는 이때 교수님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ㅎㅎ. 정말 찐 당황 하셔서 뜨악한 표정이셨습니다. (그래도 오해는 하지 마세요. 한양대학교 기계과는 학점 짜게 주기로 유명하답니다. 3.0 이상이면 당시 중위권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결론은 제가 학부 때 공부를 많이 소홀히 했다는 사실이겠죠 ㅜㅜ)

 

 당황하신 교수님께서는 뭐 그럴 수 있다면서 세부 전공인 유체역학 학점이 중요한 거라며 3학년 1학기 유체역학 점수를 물어보셨습니다. 당시 제 점수는 B+ 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교수님께서는 B+에는 만족하지 못하셨는지 중요한 건 3학년 2학기 유체역학 점수라고 하시며 또 물어보셨습니다. 제 대답은 창피하게도 C+였습니다. 교수님도 조금 심각해지신 얼굴로 혹시 다른 교수님 연구실에 가고 싶은데 자리가 없어서 여기로 오려는 거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교수님께 솔직한 제 생각과 지금의 마음을 말씀드렸는데요, 저는 그동안은 그렇게 공부에 크게 관심이 없이 살아왔지만 갑자기 이렇게 공부가 너무도 하고 싶어 졌고 그래서 GPU와 시뮬레이션 분야에 대한 연구를 꼭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이런 진심이 통한 건지 교수님은 그렇다면 제 자신을 한 번 증명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이번 4학년 1학기 때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게. 만약 자네가 이번 학기 학점 4.0이 넘는다면 그때는 자네를 받아주고 내가 자네를 지원도 해주겠네."

 

 그렇게 기회를 잡게 된 저는 정말 미친 듯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목표가 분명해지고 동기부여가 되니 공부가 너무도 잘 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7명이 듣던 유압 공학 수업이 있었는데 7명의 순위대로 A+ A B+ B 이런 식으로 성적이 매겨지는 수업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수업에서 당당히 A+를 받았고 다른 수업들에서도 A 이상의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성적 장학금을 타게 됐는데요. 저는 그렇게 제 자신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학년 2학기가 되면서 저는 인턴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는데요, 인턴생활을 계속해나가면서 느낀 점은 무조건 대학원에 진학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잘 사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어서 취업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셨습니다. 하지만 제 뜻이 확고한 걸 보시고 부모님께서도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데로 하고 싶은 공부를 해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 다른 친구들은 모두 빵빵한 대기업에 취업이 되는데 저는 제 자신의 선택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저는 정말 즐겁게 대학원 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니 밤을 새워 공부해도 재미있었고 또 연구실 분위기도 좋은 연구실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교수님께서는 제게 장학금 지원까지 해주셔서 한결 부담이 덜 했습니다. (이런 연구실을 만난 것도 제게는 천운이었습니다. 이렇지 않은 연구실도 많으니까요.)

 

 그렇게 2년간을 미친 듯이 공부했습니다. 밤새서 공부하고 연구실에 잔 날은 셀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사실 연구실에 회식이 많고 졸업하신 선배님들도 많이 놀러 오셔서 술 먹고 뻗은 날도 많긴 하답니다 ㅎㅎ) 그렇게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지낸 지 2년 결국 졸업의 시점이 다가왔고 저는 취업을 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왔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박사까지 하는 게 어떻냐고 하셨지만 이제는 정말로 취업을 해야 할 때였습니다. (저도 박사가 정말 하고 싶었지만요. 학자금이 무려 4천만 원이 넘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한 결정이었지만 4천만 원은 당시에는 정말 큰돈이었습니다.)

 

 그렇게 취업 준비를 하면서 한 CAE 회사(M사)를 알게 됐는데요, 국내에서 가장 큰 CAE 개발 회사였고 당시 정부에서 진행 중이었던 월드클래스 300 사업의 대표 격 회사였습니다. (사실 연구실 선배들이 창업한 회사도 있기는 했고 여기에 참여할지를 정말 오랫동안 고민했었습니다. 연구실 선배님께서 학자금을 대신 갚아주는 조건으로 회사 참여를 권유했었는데 정말 6개월의 고민 끝에 결국은 가지 않게 됐습니다.) 이 회사의 R&D팀 팀장님이 연구실에 찾아와서 취업 설명회도 하게 됐는데 제가 이 회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걸 알고 계셨던 교수님께서 제 대신 많은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연봉은 얼마나 주냐?"

 

 "현대차 초봉만큼은 준다"

 

 "실제로 개발도 하나?"

 

 "실제로 개발해서 출시했다."

 

등등 대놓고 많은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ㅎㅎ. (저 답변 중 현대차 초봉만큼 준다는 말은 나중에 입사하고 나니 사실이 아니었던 걸로... ㅎㅎ)

 

 그렇게 그 회사에 가기로 결심하고 저는 이력서를 작성하여 보냈습니다. 그 회사의 공채 경쟁률은 당시 100대 1이 넘는 경쟁률이었지만 R&D팀 만으로 봤을 때의 경쟁률은 2대 1 정도로 그렇게 경쟁률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당당히 합격한 저는 제 첫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에 입사한 저는 일이 너무도 재미있었고 또 제 능력을 키우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하고 배웠습니다. 남들이 보면 기겁할 제 스스로 주말에도 나와서 일하곤 했는데요, 그때는 그냥 일하는 게 너무도 재미있었습니다. 제 능력이 향상되는 것도 너무 좋았고요. 사실 제가 이렇게 열심히 일할 때 연구실 선배님께서 해주신 말이 있습니다. 회사에 100% 주지 말아라. 네가 100% 줘도 회사는 너에게 그만큼의 보상을 주지는 않는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제 능력이 향상되는 게 너무도 좋았던 저는 100%를 다해 회사를 위해 일을 했습니다.(지금 와서 보면 100%를 다 했던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많이 배웠으니까요.)

 

 그렇게 회사를 다니다가 3년 차가 되었습니다. 2015년 초에 인사평가가 있었고 조기 진급자와 포상 등이 결정되는 중요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때 정말 기대를 많이 하긴 했나 봅니다. 저는 뭐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고, 주변 분들도 좋은 일 있을 거 같다고 많이 말씀을 해주셨거든요. 하지만 제 기대와는 다르게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고 제 멘탈이 많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경영회의가 끝나고 사장님과 마주쳤는데 사장님께서 저를 보고 격려를 해주시더라구. 정말 안타깝게 됐다면서요. 하지만 그런 격려는 별 위로가 되지 못했고 부끄럽게도 저는 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리게 됐습니다. 

 

 그렇게 우울한 2015년이 시작되었고 2015년 6월에는 또 다른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정말 극도로 위험한 소세포 폐암에 걸리신 것이었는데요, 안 그래도 나가 있는 멘탈이 아버지께서 그런 병에 걸리셨다니까 완전히 나가버리게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회사에 대한 신뢰가 깨지는 일도 있었고 저는 결국 이직을 결심합니다.

 

 사실 이 커리어를 밟아 오면서 저는 언젠가는 꼭 웨타 디지털에 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요, 웨타 디지털의 아바타를 보고 이 커리어를 밟기 시작했고 당시 저는 제 첫회사에 있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 당시 상황이 어쩌면 저를 막다른 길로 휘두른걸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2015년 가을 저는 우연히 웨타디지털의 홈페이지에 들어갔고 웨타디지털에서 시뮬레이션 연구원을 뽑고 있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저는 홀린 듯 이력서를 작성하고 제 포트폴리오라고 할 수 있는 콘퍼런스 발표자료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합격이 되었고 저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첫 회사를 퇴사하고 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2016년 1월 저는 뉴질랜드에 도착하였고 지금까지 5년간 Simulation Researcher로 즐거운 해외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웨타디지털에서 정말 행복하게 일하고 있고 또 도전적인 과제들이 계속해서 주어지는 지금 환경이 너무 좋습니다 ㅎㅎ

 

 저는 이런 제 커리어가 돌아보면 제 선택과 우연이 겹쳐져서 정말 신기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제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진심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위해 정말 미친 노력을 퍼부었구요. 

 

 지금 당장은 힘들 수도 있지만 저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는 자에게는 길이 열린다고 언제나 믿습니다.